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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 (전한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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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창은 전한 초기의 인물로, 순자에게서 좌전을 배우고, 진나라에서 주하사를 지냈다. 유방을 도와 군사적 공을 세워 북평후에 봉해졌으며, 소하의 추천으로 계상을 거쳐 회남왕 유장의 재상, 어사대부를 역임했다. 문제 시기에는 승상이 되어 음률과 역법을 정비하고, 진나라 역법을 따랐다. 공손신의 주장에 반대했으나 결국 은퇴했으며, 100세가 넘는 장수를 누렸다. 저서가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으며, 문후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역법과 음악 이론에 능통했으며, 구장산술의 편집에 관여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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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 (전한 초기)

2. 일대기

기원전 206년, 고제가 한왕이 되고 항산왕 장이가 진여에게 쫓겨나 고제에게 귀순하자, 장창은 항산태수를 맡았다. 이후 한신·장이와 함께 조나라를 공격하여 진여를 사로잡았다. 조나라가 평정된 후 대나라의 상을 맡아 북쪽 변경을 수비했고, 조나라의 상으로 옮겨 조나라 왕이 된 장이를 보좌했다. 고제 5년 조경왕 장이가 죽자 조왕을 계승한 장오의 상이 되었다가 다시 대나라 상으로 옮겼다. 고제 6년, 연왕 장도의 모반을 진압하는 데 고제를 따라 종군하여 공을 세워 북평후에 봉해졌고, 식읍 1200호를 받았다.[5]

진나라에서 주하사를 지내며 얻은 행정 능력과 산학, 음률, 역법 지식을 인정받아 상국 소하에게 발탁되어, 열후로서 계상(計相)을 맡아 4년간 상부에서 군국의 장부를 관리했다. 고제 12년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다 패망하면서, 황자 유장이 새 회남왕이 되자 그의 재상이 되어 회남으로 내려갔다. 14년 후(고황후 7년), 혹은 고황후 8년(기원전 180년)에 어사대부가 되었다.[5][6]

고황후 8년, 고황후가 죽자 주발 등과 함께 대왕 유항을 황제로 옹립했다. 문제 4년, 승상 관영이 죽자 후임 승상이 되었다.[6] 장창은 고제가 처음 패상에 이른 때가 10월(진나라 역법의 정월)이라 하여 진나라 때와 같이 정월을 썼다. 또 오행설에 따라 한나라는 수덕의 시대라고 여겨 흑색을 숭상하게 했다. 계상 때부터 음률과 율관의 표준을 제정하고 백공들에게 그 규범을 따르게 했다. 특히 장창은 음률과 역법에 가장 능통했으며, 한대 학자들은 음률과 역법을 논할 때 항상 장창을 근거로 삼았다.[5]

승상이 된 지 10여 년 후, 노나라의 공손신이 토덕의 시대가 올 것이며 황룡이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창은 이를 그릇되었다고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황룡이 나타나 문제는 공손신을 박사로 삼고 새 역법을 만들게 했다. 장창은 칭탈하고 집에서 지냈는데, 천거한 관리가 부정을 저지른 것이 드러나 책망을 받자 은퇴했다. 8월 무진일에 면직되었으니, 승상이 된 지 15년 만이었다.[5][6]

장창은 늘그막에 이가 모두 빠져 여자 유모의 젖을 먹으며 여생을 보냈다. 처첩이 수백 명이었는데, 한 번이라도 아이를 밴 여자와는 다시 잠자리를 갖지 않았다.[5] 경제 5년(기원전 152년)에 100여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5][6]

2. 1. 초기 생애와 진나라 관직

순자에게서 좌전을 배웠다.[4] 상서와 음률, 역법을 좋아하여 진나라에서 어사를 지내며 각종 전적과 문서를 관리하는 주하사(主下史)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죄를 지어 달아나 고향으로 돌아왔다.[5]

유방이 패공으로서 거병하여 양무를 지날 때 장창은 유방에게 발탁되어 객(客)으로서 남양 공격에 종군했다. 그러나 죄를 지어 참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형 집행 도중 장대하고 살찌고 흰 외모를 본 왕릉이 그를 인재로 여겨 사면을 요청하여 풀려났다. 장창은 이후 왕릉에게 감사하여 그를 아버지처럼 모셨다.[5]

2. 2. 유방과의 만남과 군 경력

순자에게서 좌전을 전수받았다고 한다.[4] 상서와 음률, 역법을 좋아하여 진나라에서 어사를 지내며 각종 전적과 문서를 관리하는 주하사(主下史) 임무를 맡다가 죄를 지어 달아나 귀향했다.[5]

고제가 패공으로서 거병해 양무를 지나갈 때 장창을 발탁하여 남양 공격에 객으로 종군시켰다. 장창은 죄를 지어 참형에 처해져야 했는데, 형 집행 도중 장대하고 살찌고 흰 외모를 본 왕릉이 인재로 여겨 고제에게 청하여 사면시켜 주었다. 장창은 이후 왕릉에게 감사하여 그를 아버지처럼 모셨다.[5]

기원전 206년, 고제가 한왕이 되고 항산왕 장이가 진여의 공격을 받아 쫓겨나 고제에게 귀순하자, 장창은 항산태수를 맡았다. 이후 한신과 장이의 조나라 공격에 종군해 진여를 사로잡았다. 조나라가 평정된 후 대나라의 상을 맡아 북쪽 변경을 수비했고, 조나라의 상으로 옮겨 조나라 왕이 된 장이를 보좌했다. 고제 5년(기원전 202년)에 조경왕 장이가 죽자 조왕을 계승한 장오의 상이 되었다가 대나라 상으로 옮겼다. 고제 6년(기원전 201년), 연왕 장도의 모반 진압에 고제 밑에서 종군해 공을 세워 북평후에 봉해졌고, 식읍 1200호를 받았다.[5]

2. 3. 한나라 초기 관료 생활

순자에게서 좌전을 전수받았다고 한다.[4] 상서와 음률, 역법을 좋아해, 진나라에서 어사를 지내며 각종 전적과 문서를 관리하는 주하사(主下史) 임무를 맡다가 죄를 지어 달아나 귀향했다.[5]

기원전 206년, 고제가 한왕이 되면서 항산왕 장이가 진여의 공격을 받아 쫓겨나 고제에게 귀순하자, 장창은 항산태수를 맡았다. 이후 한신·장이의 조나라 공격에 종군해 진여를 사로잡았다. 조나라가 평정된 후 대나라의 상을 맡아 북쪽 변경을 수비했고, 조나라의 상으로 옮겨 조나라 왕이 된 장이를 보좌했다. 고제 5년(기원전 202년)에 조경왕 장이가 죽자 조왕을 계승한 장오의 상이 되었다가 대나라 상으로 옮겼다. 고제 6년(기원전 201년), 연왕 장도의 모반 진압에 고제 밑에서 종군해 공을 세워 북평후에 봉해졌고, 식읍 1200호를 받았다.[5]

진나라의 주하사를 지내면서 얻은 전적 처리 등 행정 능력과 산학, 음률, 역법에 대한 지식을 인정받아 상국 소하에게 발탁되어 열후로서 계상(計相)을 맡아 4년간 상부에서 근무하며 각 군과 국에서 올려보내는 장부를 관리했다. 고제 12년(기원전 195년)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다 패망하면서 새 회남왕이 된 황자 유장의 재상이 되어 회남나라로 내려갔다. 14년 후(고황후 7년, 기원전 181년),[5] 혹은 고황후 8년(기원전 180년)에 어사대부를 맡았다.[5][6]

고황후 8년(기원전 180년), 고황후가 죽자 주발 등 대신들과 협력해 대왕 유항을 황제로 옹립했다. 문제 4년(기원전 176년), 승상 관영이 죽으면서 후임 승상이 되었다.[6] 장창은 고제가 처음 패상에 이른 때가 10월, 곧 진나라 역법의 정월이었다 하여 진나라 때와 같이 정월을 썼다. 또 오행설에 따라 한나라는 수덕의 시대라고 여겨 진나라 시절처럼 흑색을 숭상하게 했다. 계상 때부터 음률과 율관의 표준을 제정하고 백공들에게 그 규범을 따르게 했다. 특히 장창은 음률과 역법에 가장 능통했으며, 한대 학자들이 음률과 역법을 논할 때에 항상 장창을 근거로 들었다.[5]

2. 4. 승상 재임과 율력 정비

기원전 180년, 고황후가 죽자 주발 등과 협력하여 대왕 유항을 황제로 옹립했다. 문제 4년(기원전 176년)에 승상 관영이 죽으면서 후임 승상이 되었다.[6] 장창은 고제가 처음 패상에 이른 때가 10월, 곧 진나라 역법의 정월이었다 하여 진나라 때와 같이 정월을 썼다. 또 오행설에 따라 한나라는 수덕의 시대라고 여겨 진나라 시절처럼 흑색을 숭상하게 했다. 계상 때부터 음률과 율관의 표준을 제정하고 백공들에게 그 규범을 따르게 했다. 특히 장창은 음률과 역법에 가장 능통했으며, 한대의 학자들이 음률과 역법을 논할 때에 항상 장창을 근거로 들었다.[5]

장창이 승상이 된 지 10여 년이 지나자, 노나라의 공손신이 토덕의 시대가 올 것이며 징조로 황룡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장창은 이를 그릇되었다고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황룡이 나타나 문제는 공손신을 박사로 삼고 새 역법을 만들게 해 새로 개원했다. 장창은 칭탈하고 집에서 지냈는데, 마침 장창이 천거한 관리가 부정을 저지른 것이 드러나 책망을 받자 아예 은퇴했다. 8월 무진일에 면직했으니, 승상이 된 지 15년 만이었다.[5][6]

2. 5. 말년

장창은 늘그막에 이가 모두 빠져, 여자 유모의 젖을 먹으며 여생을 보냈다. 처첩이 수백 명이었는데, 한 번이라도 아이를 밴 여자와는 다시 잠자리를 갖지 않았다.[5] 경제 5년(기원전 152년)에 100여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5][6]

3. 학문적 유산

장창은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역법과 음악 이론의 저명한 대가로 묘사되며, 한 왕조의 시스템 구축에 큰 공헌을 했다. 장창은 음양가의 대표로 여겨지며, 그의 저술은 그의 이름을 딴 책으로 편집되었다.

중국 수학 초창기의 가장 중요한 책인 ''구장산술''은 그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여겨진다.

장창은 또한 전국 시대에서 한나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공영달(574–648)은 그를 순자의 ''좌전(춘추좌씨전)'' 전수를 받은 사람으로 지목했다.[3] 당시 신학파 유학이 더 인기 있었고, ''좌전''이 고문학파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좌전'' 전문성은 주류를 이루지는 못했다.

순자의 제자였던 그는 그의 가르침을 가의에게 전했다.

참조

[1] 서적 장승상열전
[2] 서적 장주조임신도전
[3] 서적 춘추좌전정의
[4] 서적 별록
[5] 서적 사기
[6] 서적 한흥이래장상명신표
[7] 서적 사기, 한서
[8] 문서 상제 피휘
[9] 서적 사기
[10] 서적 사기, 한서
[11] 서적 사기, 사기색은
[12] 서적 사기, 한서
[13] 문서 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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